[일본 교과서 분석자료] 지유샤(自由社)교과서 들여다보기(20)

청일전쟁


<본문내용>

일본은 조선의 개국 후 그 근대화를 도와주고 근대의 제도개혁을 원조했다. 그런데 1882(명치15)년 아직 개혁이 미치지 않은 부대에 속한 일부의 조선 군인이 냉담한 대우를 받았다는 불만을 가지고 폭동을 일으켰다(임오사변). 종주국인 청은 이를 기회로 수천의 군대를 파견하여 바로 폭동을 진압하고 일본의 영향의 영향력을 약화시켰다. 1884년에는 일본의 명치유신을 본받아 근대화를 추진하려 한 김옥균 등의 쿠데타가 일어났지만 그 때도 청의 군대는 이를 진압하였다(갑신사변). 조선에서의 淸朝와의 세력 경쟁에 두 번 패배한 일본은 청과의 전쟁을 예상하여 급속히 군비를 확장하였고, 결국 거의 대등한 군사력을 축적하기에 이르렀다. (182쪽)


1894(명치27)년 조선 남부에 갑오농민전쟁이라고 불리는 폭동이 일어났다. 농민군은 외국인과 부패한 관리를 추방하려 하였고, 일시 조선반도의 남부를 제압할 정도였다. 약간의 병력밖에 없던 조선왕조는 淸에 진압을 위한 출병을 요구했는데, 일본도 청과의 합의(주1)에 따라 군대를 파견하였기 때문에 일청 양군이 충돌하여 일청전쟁이 시작되었다. 戰場은 조선 외에 만주(현 중국 동북부)의 남부 등으로 확대되고 일본은 陸戰에서도 海戰에서도 청을 압도하여 승리했다. 일본의 승인은 병기의 장비에 더하여 군대의 규율․훈련이 뛰어났었다는 것이다. 그 배경에는 일본인 전체의 의식이 국민으로서 하나로 뭉쳐졌던 점이 있었다. (주1)1885(명치18)년 일청 양국이 조선에 출병할 때에는 사전에 서로 통지한다고 하는 조약이 양국간에 체결되어 있었다.(182-183쪽)


1895(명치28)년 일청 양국은 下關조약을 맺어 청은 조선의 독립을 인정함과 동시에 일본정부의 재정수입의 약 3배에 해당하는 배상금 3억엔(2억량) 정도를 지불하고 요동반도와 타이완 등을 일본에 양도했다. 고대로부터 이어졌던 동아시아의 화이질서는 붕괴되고 중국은 순식간에 구미열강의 분할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일본이 쉽게 구미열강과 대등해지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동아시아에 야심을 가진 러시아는 독일 프랑스를 꾀어 강대한 군사력을 배경으로 요동반도를 청에 반환하도록 일본에 압박했다. 이를 삼국간섭이라고 한다. 일본이 어쩔 수 없이 요동반도를 포기하자 러시아는 곧바로 이를 영유하였다. 일본은 중국의 古事에 있는 ‘臥薪嘗膽’을 표어로 러시아에 대항하기 위해 관민 모두 국력의 충실에 힘쓰게 되었다.(183쪽)


<수정의견>

일본이 조선의 근대화를 지원한 것은 조선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천진조약에 의해, 청군의 출병을 통보하자 일본군도 조선으로 출병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청국의 통보 전에 이미 출진을 개시하였다는 점, 그리고 조약에 의해서 반드시 출병해야 하는 것이 아닌 만큼 출병의 의도, 곧 청일전쟁을 염두에 둔 출병이라는 점을 명확하게 언급해야 한다. 더 나아가 조선의 궁궐을 점령하고 내정 개혁을 들고 나온 의도에 대해서는 전혀 서술하지 않고 있는데, 일본이 청국에게 조선의 내정개혁을 공동으로 하자는 제의를 한 것은 결국 이를 거부할 청국과 전쟁을 하기 위한 명분이었음을 기술할 필요가 있다. 下關조약에서 청이 조선의 ‘독립’을 인정하는 조항은 일본의 조선침략의 명분이었다는 것을 지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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